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대한제국(폭군 고종대왕 일대기) (문단 편집) == 외교 == 열강들에게 여기저기 뜯어먹히다 일본의 식민지가 되는 비참한 원 역사와 달리 동북아시아의 맹주가 되어 열강들과 대등하게 외교관계를 맺고 있다. 물론 기술과 자본이 열악해 많은 이권을 투자 유치 명목으로 내줬지만, 따갚되에 능한데다 사학도 출신인 주인공 덕분에 장기적으론 큰 효과를 보고 있다. 그렇게 유치한 자본을 볼모 삼아 미국을 대한제국과 범아시아 조약기구 가맹국에 이롭게 조종하는 계획을 추진하는 등 열강들을 하나씩 벗겨먹으려 한다. 한편으로는 국정원이나 군사정보국 같은 정보기관들을 통해 중화제국 영향권에서 대한제국에 이익이나 위협이 될 만한 정보를 수집해 본국으로 보내거나 위협이 될 만한 요인들을 암살하는 등 각종 사보타주와 첩보활동을 벌이고 있다. 미국 공사로 파견된 민치상의 실책과 이를 이용한 [[J. P. 모건]]의 농간, 천명대전에서의 대승리 때문에 미국에는 심각한 아시아 버블이 발생했다. 미국 경제가 연착륙하려면 이 버블이 터진 뒤에도 대한제국이 버텨야 하기 때문에 미국은 꼼짝없이 대한제국을 지원해야 한다. 천명대전에서 승리한 뒤에는 중화제국을 멸망시키고 태평천국과 구 중화제국령 영토들을 9개의 번국으로 쪼갠 뒤 왕실 종친들을 왕으로 봉하고, 반항하는 세력들은 대한제국 직할령으로 삼은 낙읍 일대, 다시 말해 화중의 하남성 일대에 주둔할 대한제국군으로 진압할 태세를 갖추며, 태평천국을 번국에 포함시키되 구실만 생기면 곧바로 토벌할 생각을 하는 등 남중국 일대를 영향권에 넣으려 하고 있다. 그리고 얼마 뒤, 계획대로 태평천국이 선제공격을 하자 단숨에 홍천귀복을 제거하고 태평천국을 멸망시켰다. 이후 유럽전쟁에 온 신경이 간 러시아 정부 대신 러시아의 극동지역 수뇌부와 밀약을 맺어 반 대한제국 성향의 몽골족들을 승전 제물로 내주는 대신, 연해주와 블라디보스토크 일대를 확보한다. 유럽대전 종전협정에 승전국으로 참가, 협의는 베를린에서 하지만 마지막 조인은 자금성에서 하게 되었다. 이는 이형이 더 이상 암약 못 하게 무대 위로 끌어올리려는 영국의 계획...이었지만, 대한제국의 내정 정비가 워낙 시급해서 이형이 처음부터 끝까지 다 챙겨야 했던 터라 내각 총리대신 박규수가 전권대사로 참석하게 되어 뜻하지 않게 회피한다. 그리고 그렇게 파견된 박규수가 알렉산드르 대공과 캄차카 조약을 체결하면서 일본과 영국에게 엿을 먹이는 동시에 대한제국의 이득을 극대화하고, 이 조약이 서유럽 금융공황으로 인한 정치-경제적 파급효과와 맞물려 이번에는 대한제국이 자국뿐만 아니라 미국(의 카네기 측)까지 끌어들여 영국과 일본에게 엿을 먹이게 되었다. 다행히 영국과의 교섭이 매우 원만하게 타결되어 검은 월요일 전 기준으로 총 300만 달러 상당의 24K 금괴와 560만 달러 가량의 14K 금괴를 영국 국채 매입 대금과 차관으로 제공하는 대신, 대한제국의 경제성장과 산업화에 대한 대영제국의 전면적 협력을 약속받고, 주한 영국 공사인 토마스와 디즈레일리 등 영국 본국의 정계에도 친한파를 만드는 데 성공한다. 여기에 더해 영국에 엄청나게 큰 마음의 빚을 안기면서 대영제국과 확고한 동맹 관계를 형성하는 밑바탕을 튼튼하게 다지며 대한제국 중심의 아시아 질서 확립에 더욱 가속도를 붙인다. 한편으로는 프랑스의 나폴레옹 4세가 루이와의 대화를 통해 아시아 방면의 사정을 검토하고는 코친차이나 식민지를 대한제국에 매각, 그 대금으로 아프리카를 정복해 대한제국과 함께 유라시아 동서 양쪽에서 러시아와 대독일 신성 로마 제국의 해양 진출을 저지하는 대전략을 구상하고 있기에 영-프 양국 간의 조정자 역할을 맡게 될 수도 있다.[* 영-프-한 삼국이 뭉치게 되면 신성 로마 제국과 러시아는 동(대한제국의 태평양 방면.), 서(북대서양 출입구인 [[GIUK|GIUK+F]]와 중대서양 출입구인 지브롤터.), 남(영국령 인도의 인도양 방면.) 삼면에서 바다로 진출할 길이 막힌다. 북쪽엔 북극뿐이고, 그 중 반은 캄차카 조약 때문에 대한제국에 넘어갔다.] 원 역사에서 대한제국이 처했던 상황과 비교하면 180도 다르다. 단점은 유학풍 명분의식에 젖은 관료, 의원들이 아직 열강에 대한 지식이 모자라 국제정세도 잘 모르면서 무조건 친프랑스 노선을 타는 모습을 보인다. 친영파는 강남 사태로 발언력을 잃었고, 이에 이형은 김가진을 통해 독일과의 관계수립에 나서기로 한다. 이형의 즉위 20년이 지나고 난 뒤에는 젊은 개화파였던 친불계 정치가들이 기득권이 되어, 여전히 군권을 움켜쥐고 있는 황제에게 절대적으로 충성하는 방향으로 고였다가, 어느 공무원 예정 프랑스 유학생이 생각없이 한양 한복판에서 삼색기를 휘두르며 혁명을 외친 사건 때문에 기회만 노리던 친영파, 친미파, 친독파에게 어그로를 끌었고, 어느 정도 세력을 내 주게 되었다. 문제의 유학생은 황제의 자비로 풀려났지만 산을 타다가 호환을 당했다고 한다. 왜 산에 갔는지, 대충 해수구제사업 끝낸 대한제국에서 어디서 갑자기 범이 나왔는지는 불명. 시간이 흐르면서 이형의 절대적인 영향력 아래 있다는 사실은 변함없어도 자신의 사상과 신념에 따른 논쟁이 벌어지는 정도까지는 발전한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